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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인구 1236.6만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

예천 임씨

醴泉 林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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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6.6만

2015 인구

123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임춘林椿

1149년 무렵에 태어나 1182년 무렵 세상을 떠난 고려 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다.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은 평장사, 아버지 임광비(林光庇)는 상서를 지낸 명문 출신이었으나 스무 살 무렵 무신정변으로 가문이 화를 입고 대대로 내려오던 공음전까지 빼앗겼다. 개경에서 5년간 숨어 지내다 영남으로 피신해 7년가량 떠돌았으며, 이때 예천에 자리 잡으면서 후손들이 예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시조 임춘(林椿)은 1170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화를 피해 예천으로 옮겨 살았고, 후손들이 이를 계기로 예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임춘은 이인로·오세재·조통·황보항·함순·이담지와 함께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해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불렸다. 본관 예천은 경상북도 예천군으로, 신라 때 수주군(水酒郡)이었다가 757년 경덕왕 때 예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에 들어 보주(甫州)로 고쳐졌다가 1172년 기양현(基陽縣)으로, 1204년 지보주사로 승격되었고, 조선 초 1413년 보천군(甫川郡)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예천군이 되었다. 임춘은 뒤에 예천의 옥천정사에 제향되었다.

가문의 역사

임춘은 술을 의인화한 『국순전』과 돈을 의인화한 『공방전』 같은 가전체 작품을 남겼고, 그의 시문은 뒷날 『서하선생집』 6권으로 엮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억숙(林億淑)이 양양에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금소로 들어와 살면서 금소리 일대에 예천 임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금소리에는 입향조의 증손인 임세명·임근명·임순명 삼형제의 우애를 기린 화악정(花萼亭)과 시조 임춘을 추모해 세운 모하정(慕河亭), 문집 목판을 보관한 세복당(世馥堂)이 남아 있다. 임만휘(林萬彙)는 필법과 의술에 능해 『만문유고』를 남겼고, 그 아들 임응성(林應聲)은 예학에 밝아 퇴계의 예학을 정리한 『계서예집(溪書禮輯)』을 저술하였다. 2015년 인구는 66,492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조선

임억숙

조선 중기에 양양에서 안동 금소로 옮겨 와 정착한 입향조로, 금소리 예천 임씨 집성촌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임만휘

필법과 의술에 능했던 학자로 문집 『만문유고』를 남겼다.

조선

임응성

임만휘의 아들로 예학에 밝아 퇴계의 예학을 정리한 『계서예집(溪書禮輯)』을 저술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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