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정씨
靈光 丁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6.4만
2015 인구
126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정진丁晉
고려조에 태학생원(太學生員)을 지낸 인물이다.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삼아 영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영광 정씨는 고려조에 태학생원을 지낸 정진(丁晉)을 시조로 하며, 영성 정씨(靈城丁氏)라고도 부른다. 계통상으로는 압해 정씨(押海丁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전한다. 압해 정씨의 도시조로는 당(唐) 문종 때 대승상을 지냈다는 정덕성(丁德盛)이 전해지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정덕성의 실존 여부에 회의적이어서 이를 근거 없는 날조라고 비판하였다. 본관인 영광(靈光)은 전라남도 북서부 해안에 인접한 영광군 일대의 옛 지명이다. 백제 때의 이름이 신라를 거치며 여러 차례 바뀌었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지금의 영광군이라는 이름이 확정되었다.
가문의 역사
조선시대에 문과 21명, 무과 10명, 생원시 20명, 진사시 13명 등 모두 6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문중은 훈련공파·함열공파·불우헌공파 등 여러 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 전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로 꼽히는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이,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을 도운 노장 정걸이 이름을 남겼다. 근현대에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무총리,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집성촌은 전라남도 고흥군·보성군·무안군·장흥군·순천시와 전라북도 고창군, 황해남도 장연군 등 여덟 곳에 분포한다. 2015년 인구는 64,129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정극인
1401년에 나서 1481년에 죽은 문신으로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다. 세종 때 생원시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태인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고, 1472년(성종 3) 그 공으로 3품 교관에 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꼽히는 상춘곡을 지었으며 문집으로 불우헌집이 전한다.
정걸
1516년에 나서 1597년에 죽은 무장으로 전라좌수사·전라우수사·전라병사·충청수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78세의 노장으로 전라좌수군 조방장이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왔고, 충청수사로서 행주대첩과 서울 탈환전에도 수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정일권
1917년에 나서 1994년에 죽은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제5·8대 육군참모총장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지내고 1954년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예편 후 외무부 장관과 주미 대사를 거쳐 제9대 국무총리와 제9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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