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정씨
瑞山 鄭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1.9만
2015 인구
268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정인경鄭仁卿
1237년 지금의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서 태어나 1305년에 세상을 떠난 고려의 문신이다. 1256년 몽골군이 직산과 신창에 진을 쳤을 때 종군해 야습으로 공을 세웠고, 몽골어와 고려말에 두루 밝아 세자를 호종하며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도첨의중찬에 올라 벽상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안사공신에 봉해졌으며,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짐에 따라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서산 정씨의 원조 정신보(鄭臣保)는 중국 절강 지역에 살던 정씨 후손으로 송나라가 망할 무렵 고려 고종 때 바다를 건너와 서산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그 아들 정인경이 고려 충렬왕 대에 큰 공을 세우고 서산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서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서산은 충청남도 서산시로, 1284년 정인경의 공을 기려 부성현(富城縣)이 서주군(瑞州郡)으로 승격되었다고 전한다. 정인경은 아버지 정신보와 함께 서산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고,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에 그의 묘역과 신도비가 남아 있다.
가문의 역사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명과 무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고,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도 여럿 나왔다. 문과에는 정결·정성량·정인함·정희·정희렴이 올랐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내암 정인홍으로, 조식의 수제자로서 남명학파를 이끌었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성주와 대구 일대에서 활동해 영남 의병장으로 불렸다. 그는 광해군 대에 대북의 영수로 영의정에 올라 서령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 뒤 화를 입었고 1908년에야 복권되었다. 집성촌은 청주 문의면과 영동군 죽전리, 광주 서구 서창동, 김천 대덕면, 함양 지곡면 덕암리, 합천과 장성 등지에 형성되어 있다. 2015년 인구는 18,61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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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주요 인물
정신보
서산 정씨의 원조로,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고려로 망명해 서산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아들 정인경과 함께 서산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인홍
조식의 수제자로 남명학파를 이끈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전란 뒤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고 대북의 영수가 되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서령부원군에 봉해졌다. 호는 내암이고 인조반정 뒤 처형되었다가 1908년 복권되었다.
정인함
조선시대 서산 정씨 문과 급제자의 한 사람으로,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올랐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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