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스캐너
본관 인구 1019.3만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표기 변형 합산

진주 류씨

晉州 柳氏

2

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9.3만

2015 인구

101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류정柳挺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로 중서령을 지내고 좌우위 상장군에 올라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후손들이 진주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으며, 이 계통을 토류계(土柳系)라 부른다. 진주 류씨에는 계통을 달리하여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의 9대손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이류계(移柳系)도 있다.

시조 류정이 진강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진주 류씨는 본래 진주 땅에 뿌리를 둔 토류계와, 문화 류씨에서 갈려 나와 진주에 자리 잡은 이류계로 나뉘어 계통이 서로 다르다. 이류계의 시조 류인비는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의 9대손으로 전한다. 본관 진주는 경상남도 서부의 고을로, 백제의 거렬성(居烈城)이었다가 663년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가 되었고 이후 청주(菁州)와 강주도독부를 거쳤다. 고려 때 강주로 불리다가 983년 진주목이 되었고, 조선에서 진양대도호부와 진주목을 거쳐 1939년 진주시로 승격했다. 성씨 한자 柳를 두음법칙에 따라 유로 적기도 하고 진주의 옛 이름 진양(晉陽)을 쓰기도 하여, 통계에서는 진주 유씨·진양 류씨·진양 유씨 같은 표기가 함께 나타난다.

가문의 역사

고려 때 류돈식(柳敦植)은 후군병마사로서 1217년 거란의 침입을 격퇴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류염(柳琰)은 성균관대사성과 판한성부사를 거쳐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올랐고 청백리에 뽑혔다. 조선 중기에는 류순정(1459~1512)이 1506년 성희안·박원종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킨 삼대장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류인귀(1463~1531)는 정언과 대사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류조인(1522~1599)은 선조를 호종하고 형조참의에 올랐으며, 류근(1549~1627)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한성부판윤과 좌찬성을 지냈다. 집성촌은 경상남도 합천군·산청군·거제시를 비롯해 경기도 안성시, 경상북도 상주시, 충청북도 청주시, 인천 서구 등 아홉 개 지역에 있다. 2015년 인구는 93,073명이다.

독립유공자 2명 확인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2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이름생몰년본적운동계열훈격본관 근거공적조서
유일한柳一韓1894–1971서울미주방면건국훈장 독립장(1995)위키백과 ↗공훈록 ↗
유상근柳相根1911–1945강원도 통천의열투쟁건국훈장 독립장(1968)역대인명정보공훈록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고려

류돈식

후군병마사로서 1217년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무장이다.

고려

류염

성균관대사성과 판한성부사를 거쳐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오른 문신으로 청백리에 뽑혔다.

조선

류순정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킨 삼대장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처음 무안(武安)이었다가 문정(文定)으로 고쳐졌다.

조선

류근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한성부판윤과 좌찬성을 지낸 문신이다.

참고 자료

같은 씨의 다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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