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변씨
黃州 邊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8,037
2015 인구
376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변려邊呂
중국 농서(隴西)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송경을 침입하자 강화로 피난한 고종을 시종한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태천백에 봉해지고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하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아 본관을 황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황주 변씨는 고려 고종 때의 무신 변려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변려는 중국 농서에서 고려로 건너왔다고 전하며,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때 강화로 피난한 고종을 시종한 공으로 상장군에 오르고 태천백에 봉해져 식읍을 받았다고 한다. 본관 황주는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 일대로, 고구려 때 동홀 또는 동어홀이라 불렸고 757년 취성군으로 고쳤다가 태봉 때 황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가문은 석계공파·명산공파·운곡공파·첨정공파·치재공파·자하공파·망암공파·휴암공파·청암공파·사용공파·절충공파 등 열한 개 파로 나뉜다.
가문의 역사
가문은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8명과 무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변이중은 1573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자신이 지은 화차도설과 총통화전도설에 따라 화차 300량을 만들고 그 가운데 40대를 행주산성의 권율에게 보내 승리에 힘을 보탰다. 그의 아들 변경윤은 160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대북파를 비판하다가 가산을 적몰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변치명과 변득양이 잇달아 공조판서에 올라 각각 효헌과 효정의 시호를 받았다. 집성촌은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일대에 형성되었으며, 2015년 인구는 8,037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변이중
1546년에 태어나 1611년에 죽은 문신이다. 1573년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모사와 조도어사를 맡아 화차 300량을 제작하여 그 일부를 행주산성에 보냈다. 선산 부사와 함안 군수를 지냈으며 문집 망암집과 화차도설·총통화전도설 등을 남겼다.
변경윤
1574년에 태어나 1623년에 죽은 문신으로 변이중의 아들이다. 160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대북파를 비판하다가 가산을 적몰당하였다.
변치명
1693년에 태어나 1775년에 죽은 문신이다. 175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헌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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