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서씨
長城 徐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1만
2015 인구
347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서릉徐稜
고려 고종 때의 이름난 효자로, 자는 대방(大方)이고 아버지는 흥위위 보승별장을 지낸 서희팔이다. 어머니 봉양에 힘써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1246년 어머니의 목에 악성 종기가 생기자 의원이 산 개구리가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나무 아래에서 울며 약을 달이던 중 나무 위에서 무엇인가 약 그릇에 떨어졌고 그것이 개구리여서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는 효행담이 전한다. 고려사 효우 열전에 실렸고 고종에게서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성 서씨는 고려 고종 때의 효자 서릉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서릉이 장성현 사람이었던 데서 본관이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본관 장성은 본래 백제의 고시이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갑성군으로 고쳐졌고 고려에 들어와 장성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전라남도 장성군이다. 다만 족보에서는 우리나라 서씨의 여러 본관이 모두 아간 서신일의 후손이며 장성은 이천의 별파라고 보고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시 서릉의 본관을 이천(利川)으로 적고 있다. 그런 까닭에 현대에는 일부가 이천 서씨에 합본하여 절효공파라 하고, 일부는 장성 서씨를 그대로 이어 오고 있다.
가문의 역사
가문은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는 내지 못하였고 무과 19명, 생원시 5명, 진사시 9명, 역과 2명 등 모두 3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시조 서릉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는 1578년에 세워졌으며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에 있고 1988년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릉은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배우러 찾아온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십훈(十訓)을 지었다고 전하며, 고려 무신집권기를 대표하는 효자로 평가된다. 인구는 1985년 6,382명, 2000년 4,832명으로 집계되었으며 2015년 인구는 10,137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서릉
고려 고종 때의 효자로, 고려사 효우 열전에 입전되고 절효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장성에 정려비가 남아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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