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서씨
利川 徐氏
6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20만
2015 인구
45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서신일徐神逸
신라 효공왕 때 아간대부를 지낸 인물로, 국운이 기울자 이천 효양산에 은거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서씨의 도시조(都始祖)로 받들어진다.
시조 서신일이 신라 말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면서 후손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935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정벌에 나섰을 때 그의 후손 서목(徐穆)이 복하천 도하를 도운 공으로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큰 내를 건너니 이롭다)'에서 두 글자를 딴 이천(利川)이라는 지명이 내려졌고, 이것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대구 서씨, 달성 서씨 등 여러 서씨 본관이 이천 서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본다.
가문의 역사
고려 시대에는 서필(내의령)·서희(내사령)·서눌(문하시중) 3대가 잇달아 재상에 오르며 인천 이씨, 해주 최씨, 남양 홍씨와 더불어 최고 문벌로 꼽혔고, 7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특히 서희는 993년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해 싸우지 않고 강동 6주를 얻어낸 외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23명을 배출했다.
독립유공자 6명 확인
서일徐一
건국훈장 독립장대종교 지도자이자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대첩을 이끈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순국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서윤제徐允濟
건국포장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종교에 입교해 전교 활동을 하며 안희제 등과 발해농장을 근거로 독립운동을 벌이다 목단강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서태석徐邰晳
건국훈장 애국장1923년 전남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를 지도해 승리로 이끈 농민운동가로, 3·1 운동 참여와 항일 활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003년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출처 확인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5명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서희
거란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한 고려의 외교가이자 문신이다.
서필
광종 대의 재상으로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명신이며 서희의 아버지이다.
서눌
서희의 아들로 문하시중에 올라 3대에 걸친 재상 가문을 완성했다.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흥사단 이사장을 지낸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으로 한국 화장품 산업을 세계 시장에 알린 기업인이다.
서정범
국어학자이자 수필가로 한국어 어원 연구와 무속 연구를 개척했다.
참고 자료
같은 서씨의 다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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