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스캐너
본관 인구 1983.3만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표기 변형 합산

나주 오씨

羅州 吳氏

2

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3.3만

2015 인구

198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오언吳偃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인물로 나주 오씨의 기세조다. 관조 오숙규(吳淑珪) 이후 4대의 계보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오언을 1세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관조 오숙규는 고려 중엽에 진사를 지냈다고 전하나 그 뒤 4대의 계보가 끊겨, 중랑장 오언을 기세조로 삼아 계대한다.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시로, 고려 태조의 비 장화왕후가 이 지역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이고 그 아들이 고려 제2대 왕 혜종이어서 일찍부터 나주 오씨와 왕실의 인연이 전한다. 오언의 5세손 오자치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지면서 가문의 기틀이 굳어졌다. 나주의 옛 이름을 따 금성 오씨(錦城吳氏)라고도 불리며, 통계에서도 두 이름이 따로 집계된다.

가문의 역사

고려조에는 오계진이 중랑장을 지내고 예빈시정에 추증되었으며, 오탁진은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오중달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정당문학을 거쳐 보문각·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오자치는 1467년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을 지낸 뒤 나성군에 봉해졌는데, 1476년에 그린 공신 초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전한다. 오자치의 손자 오겸은 전라도관찰사와 호조참판,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 경기전 참봉이던 오희길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봉안해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이 전해지는 데 큰 몫을 하였다. 2015년 인구는 32,641명이다.

독립유공자 2명 확인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2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이름생몰년본적운동계열훈격본관 근거공적조서
오성술吳成述1884–1910전라남도 광산의병건국훈장 독립장(1977)위키백과 ↗공훈록 ↗
오상렬吳相烈1879–1907전라남도 광산의병건국훈장 애국장(1990)역대인명정보공훈록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고려

오중달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정당문학을 거쳐 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한 문신이다. 자는 가원이고 호는 남강이다.

조선

오자치

시조 오언의 현손으로 1467년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 적개공신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을 지낸 뒤 나성군에 봉해졌다.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은퇴하였으며 시호는 양평이고, 1476년에 제작된 공신 초상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오겸

1496년에 태어나 1582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으로 오자치의 손자다. 1532년 별시에 급제해 전라도관찰사와 호조참판,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좌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간이다.

조선

오희길

1556년에 태어나 1625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경기전 참봉으로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냈다.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불탄 상황에서 실록을 후대에 전한 공이 크며 호는 도암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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