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스캐너
본관 인구 2651.9만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

고창 오씨

高敞 吳氏

4

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1.9만

2015 인구

265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오학린吳學麟

고려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를 지낸 문신이다. 문헌공 최충(崔沖)이 세운 구재(九齋)에서 배워 학문이 깊었다고 전한다. 고창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고창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시조 오학린이 고려 정종 때 한림태학사를 지내고 고창을 식읍으로 받으면서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창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일대의 지명이다. 고창 오씨는 현존하는 한국 오씨의 14개 본관 가운데 가장 먼저 본관을 얻은 종파로 전한다. 시조의 아들 대에도 오질(吳質)이 한림학사를 지내 대대로 문한(文翰)의 가풍을 이었다고 한다.

가문의 역사

시조의 고손자 오인정은 묘지명이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로 남아 있다. 6세에 이르러 오세공(吳世功)·오세문(吳世文)·오세재(吳世才)가 나왔는데 모두 고려 명종 때의 학자로 학문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중 오세재는 이인로·임춘 등과 어울린 해좌칠현(海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쉰세 살의 나이로 이규보와 망년지교를 맺었고 그가 죽자 이규보가 「오선생덕전애사」를 지어 추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배운 오운(吳澐)이 경주부윤에 오르고 역사서 『동사찬요』를 편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오여상이 나왔다. 근현대에는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오화영과 영주 만세시위를 주도한 오하근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2015년 인구는 18,856명이다.

독립유공자 4명 확인

오화영吳華英

건국훈장 독립장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남감리회 목사가 되어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수표교교회 담임목사와 신간회 서무부장 등으로 활동하다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겪었다. 해방 후 조선민족당 당수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60년 세상을 떠났으며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오하영(吳夏英)으로 표제하고 화영(華英)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한다.

출처 확인 ↗

오하근吳夏根

건국훈장 애족장

1897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익혔다. 1919년 3월 21일 영주 장날에 박인서·권태중과 함께 미리 만든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80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3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이름생몰년본적운동계열훈격본관 근거공적조서
오화영吳華英1880–1960서울3.1운동건국훈장 대통령장(1989)역대인명정보공훈록 ↗
오석준吳錫俊1862–1915황해도 평산의병건국훈장 애족장(1990)역대인명정보공훈록 ↗
오병용吳秉鎔1881–1968전라북도 임실3.1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0)위키백과 ↗공훈록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고려

오세재

이인로·임춘 등과 함께 해좌칠현으로 불린 고려 명종 때의 문인이다.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만년에 동경에 살다 가난 속에 세상을 떠났으며, 『동문선』에 오언율시 두 수와 칠언율시 한 수가 전한다.

고려

오세문

오세공·오세재와 함께 고려 명종 때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

오운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다. 상주목사와 합천군수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경주부윤을 지내고 공조참의에 올랐으며, 호는 죽유로 『죽유문집』을 남기고 『동사찬요』를 편찬하였다.

참고 자료

같은 씨의 다른 가문

다른 가문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