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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인구 3111.3만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

강화 최씨

江華 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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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1.3만

2015 인구

311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최익후崔益厚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를 지내고 정당문학에 오른 인물이다. 강화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시조 최익후가 강화에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강화를 관향으로 삼았다. 강화는 한강 하구의 섬 고을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해당한다. 고려가 몽골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겼던 곳으로 왕도의 지위를 누린 적이 있는 지역이다. 시조가 상서좌복야와 정당문학을 지낸 고려 중엽의 관인이었던 만큼 이 가문은 고려 관료 가문에서 출발한 계통으로 전한다.

가문의 역사

과거 급제자는 문과 20명, 무과 16명, 생원시 20명, 진사시 14명에 이른다. 조선 초의 최용소는 1394년 회례사로 일본 규슈에 파견되어 왜구를 토벌하고 두 나라가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규슈절도사에게 전하였고, 그가 보낸 승려 종구와 함께 붙잡혀 갔던 조선인 5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최용소는 이후 상의중추원사와 강원도도관찰사, 개성부유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1422년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제정이다. 집성촌은 세종특별자치시,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 감월리,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삼기면 등에 형성되어 있다. 2015년 인구는 13,372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조선

최용소

1422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1394년 회례사로 일본 규슈에 파견되어 왜구 토벌을 청하는 국서를 전하고 피로인 5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개성부유후·공조판서·형조판서·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성품이 청백하고 절개가 굳으며 언행이 정중하였다고 전하고 시호는 제정이다.

근현대

최대교

제6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법조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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