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스캐너
본관 인구 3867,287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

중화 양씨

中和 楊氏

1

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7,287

2015 인구

386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양포楊浦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졌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당악이 중화의 옛 이름이어서 후손들이 중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군 정면 양지리에 있다고 전한다.

중화 양씨는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내고 당악군(唐岳君)에 봉해졌다고 전하는 양포를 시조로 한다. 당악(唐岳)은 중화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시조의 봉호를 따라 중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본관 중화(中和)는 평안남도 남단의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가화압, 신라 때에는 당악현이라 불렸고 고려 초 서경에 편입되었다가 1136년 중화현으로 독립하였으며 뒤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6세손 양백지가 고려 말 서경천호를 지낸 뒤로 후손들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가문의 역사

시조의 맏아들 양동무는 간의대부를 거쳐 이부상서에 올랐고 1270년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아우 양경무와 양견무도 고위 관직을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5명, 무과 급제자 4명, 사마시 입격자 26명을 배출하였다. 5세손 양원격의 증손 양희지(1439~1504)는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과 대사간,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양백지의 7대손 양덕록(1553~1635)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2015년 인구는 7,287명이다.

독립유공자 1명 확인

양우조

건국훈장 독립장

1896년에 태어나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하였고 1930년대 초부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한성을 발행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과 생계부·재무부에서 활동하였으며 한국광복군 정훈처에서 정령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출처 확인 ↗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1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이름생몰년본적운동계열훈격본관 근거공적조서
양우조楊宇朝1897–1964평안남도 강서임시정부건국훈장 독립장(1963)역대인명정보공훈록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고려

양동무

시조 양포의 맏아들로 간의대부를 거쳐 이부상서에 올랐다. 1270년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다.

조선

양희지

자는 가행, 호는 대봉이며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제학과 대사간, 한성부우윤 등을 지낸 문신이다.

조선

양덕록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킨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뒤에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참고 자료

같은 씨의 다른 가문

다른 가문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