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채씨
仁川 蔡氏
1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4.3만
2015 인구
162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채선무蔡先茂
고려 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에 추증된 인물이다. 단소(壇所)는 대구 도곡산에 있다.
인천 채씨는 고려 때 동지추밀원사에 추증된 채선무(蔡先茂)를 시조로 하며, 본관인 인천(仁川)은 오늘날의 인천광역시이다. 채씨의 먼 연원으로는 사기에 나오는 황제헌원씨의 증손 설(契)의 후손 채림(蔡琳)이 기자를 따라 고조선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신라 때 내물왕의 옹주와 혼인한 채보한의 후손 채원광이 부마이자 정승을 지냈다는 서술도 함께 전한다. 시조의 아들 채신징(蔡愼徵)은 은청광록대부로 대장군을 지냈다. 손자 채보문(蔡寶文)은 1163년(의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대제학을 지내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가문의 역사
10세 채귀하(蔡貴河)의 손자 대에서 직장공파·필선공파·판서공파·참의공파·군수공파·생원공파·배천공파의 일곱 파로 나뉘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1명과 생원·진사 85명을 배출하였다. 1469년(예종 1)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채수는 대사헌과 호조참판을 지내고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에 녹훈되고 인천군에 봉해졌으며, 그 아들 채소권은 형조판서에, 손자 채무일은 이조정랑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채무와 채이항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집성촌은 인천광역시를 비롯해 경상북도 상주시·문경시·칠곡군·포항시, 대구광역시 동구, 충청북도 음성군, 충청남도 금산군 등에 분포한다. 2015년 인구는 43,387명이다.
독립유공자 1명 확인
채기중蔡基中
건국훈장 독립장1873년에 나서 1921년에 죽은 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풍기광복단을 결성하고 1915년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경상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 1918년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1명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 이름 | 생몰년 | 본적 | 운동계열 | 훈격 | 본관 근거 | 공적조서 |
|---|---|---|---|---|---|---|
| 채기중蔡基中 | 1873–1921 | 경상북도 상주 | 국내항일 | 건국훈장 독립장(1963) | 역대인명정보 | 공훈록 ↗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채수
1449년에 나서 1515년에 죽은 문신으로 1469년(예종 1)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대사헌과 충청도 관찰사, 호조참판을 지냈고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에 녹훈되고 인천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채이항
1596년에 나서 1666년에 죽은 인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청나라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에 잡혀갔다 돌아왔으며,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경헌(景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채헌징
1648년에 나서 1726년에 죽은 문신으로 167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헌납과 사헌부 지평, 진주목사와 영해부사 등을 지냈고 문집으로 우헌문집이 전한다.
채문식
1925년에 나서 2010년에 죽은 정치인으로 제8대부터 제13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11대 국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참고 자료
같은 채씨의 다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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