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유씨
務安 兪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5,896
2015 인구
405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유순직兪舜稷
고려 때 삼중대광으로 검교소부소감을 역임한 인물이다.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처음에는 장사(長沙)를 본관으로 삼았다. 뒤에 증손 유천우가 무안부원군에 추봉되면서 본관을 무안으로 옮겼다.
무안 유씨는 고려 때 삼중대광 검교소부소감을 지내고 장사군에 봉해진 유순직을 시조로 한다. 처음에는 시조의 봉호를 따라 장사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증손 유천우(兪千遇)가 사후에 무안부원군(務安府院君)으로 추봉되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무안으로 옮겨 세계를 이어왔다. 본관 무안(務安)은 전라남도 무안군 일대의 지명으로, 백제 때 물아혜군(勿阿兮郡)이라 불리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안군으로 개칭되었다.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다가 991년(성종 10) 다시 무안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 무안현으로 개편되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면천(綿川)·면성(綿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가문의 역사
중시조 유천우는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원종 때 지어사대사로 있으면서 김인준 등과 함께 최의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정당문학과 중서시랑평장사를 거쳐 충렬왕 때 찬성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유영원(兪永元)은 이부상서와 좌복야를, 손자 유윤수(兪允粹)는 문하시랑평장사와 우문관대제학을 지내 고려 후기에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1명, 잡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으며, 보령파와 청양파로 나뉘어 충청도 지역에 세거하였다. 2015년 인구는 5,896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유천우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원종 때 지어사대사로 최의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당문학과 중서시랑평장사를 거쳐 충렬왕 때 찬성사를 역임하였으며, 사후 무안부원군에 추봉되어 무안 유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유희익
유천우의 증손으로 1456년(세조 2)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역학과 성리학에 정통하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유환방
대한제국의 중추원의관을 지내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항일조직인 애국단의 충남도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아들 유경재와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다 투옥되었으며, 충청남도 청양 저운리에 의사비가 세워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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