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음 봉씨
河陰 奉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1.2만
2015 인구
326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봉우奉佑
고려 인종 때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위위시경과 정당문학을 지내고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진 인물이다. 1106년 하음산 기슭 연못가에 석함이 떠올랐는데 그 안에 아이가 들어 있었고, 한 노파가 이를 왕에게 봉헌하였다 하여 성을 봉(奉), 이름을 우(佑)로 지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한다. 후손들이 그의 봉호를 따라 본관을 하음으로 삼았다.
하음 봉씨는 고려 인종 때의 문신 봉우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1106년 강화의 하음산 기슭 연못가에 떠오른 석함에서 아이가 나왔고 이를 노파가 왕에게 봉헌하였으므로 성을 봉이라 하고 이름을 우라 지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한다. 봉우가 하음백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하음으로 삼았다. 본관 하음은 고구려의 동음내현에서 신라 때 호음현을 거쳐 고려 태조 때 하음현으로 고쳐졌고, 1413년 강화에 통합되어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일대이다. 강화 봉씨는 하음 봉씨의 이칭으로 쓰여, 2015년 조사에서 하음 봉씨 7,688명과 강화 봉씨 4,165명이 따로 집계되었다.
가문의 역사
가문은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명, 무과 급제자 16명, 사마시 합격자 22명을 배출하였다. 7세손 봉천우는 1327년 우부대언으로서 원나라에 억류된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겸이다. 10세손 봉려는 딸이 왕세자빈이 되면서 형조·병조·호조·이조의 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숙이다. 11세손 봉여해는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결의하였다가 모역죄로 처형되었고, 같은 시기의 봉석주는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어 강성군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11,853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봉천우
시조 봉우의 7세손이다. 1327년 우부대언으로서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겸이다.
봉여해
1419년에 태어나 1456년에 죽었으며 병조판서 봉즙의 아들이다. 사옹원별좌를 지냈고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결의하였다가 모역죄로 처형되었다.
봉준호
1969년에 태어난 영화감독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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