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 계씨
遂安 桂氏
4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6,056
2015 인구
403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계석손桂碩遜
명나라에서 예부시랑을 지내다가 홍무제의 명으로 1394년 조선에 예학을 전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전한다. 1407년(태종 7)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수안계씨족보에 따르면 명나라 성양태수를 지낸 계경횡(桂炅橫)의 셋째 아들이다.
수안 계씨는 명나라 예부시랑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에 봉해진 계석손을 시조로 한다. 그는 1394년 예학 전수를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1407년 귀화하였다고 전하며, 후손들이 그의 봉호를 따라 수안을 관향으로 삼았다. 본관 수안(遂安)은 오늘날 황해북도 수안군 일대의 지명이다. 본관지와 주요 세거지가 모두 북한 지역에 속해 있어 분단 이후에는 남한으로 내려온 후손들을 중심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가문의 역사
계석손의 아들 계원우(桂元祐)가 합문지후를 지냈고, 그의 아들 계문식(桂文植)은 우대언을 역임하며 왕명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10명, 사마시 합격자 10명 등 모두 2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계지문과 병자호란 때 선천성을 지킨 계유명처럼 서북 지역 방어에 나선 인물이 여럿 나왔고, 계태형(桂泰衡)은 노천에 서원을 세워 후학을 길렀다. 집성촌은 평안북도 선천군과 강계군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2015년 인구는 6,056명이다.
독립유공자 4명 확인
계화桂和
건국훈장 독립장만주에서 중광단(重光團)과 대한정의단, 대한군정서를 조직하고 재무부장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에 주력하였다.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계지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아들 계천상·계익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682년(숙종 8) 조정에서 그 공훈을 기려 정려를 세웠다.
계덕해
1708년에 태어나 1775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영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참봉이 되었고, 1774년 평안도 별시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예조좌랑·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봉곡계찰방유집이 있다.
계용묵
1904년에 태어나 1961년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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