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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인구 3618,713명 · 2015 인구주택총조사

사천 목씨

泗川 睦氏

3

확인 독립유공자

0

수록 친일 기록

8,713

2015 인구

361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목효기睦孝基

고려 고종 때 요무장군낭장동정(耀武將軍郞將同正)을 지낸 인물이다. 아들 목덕창(睦德昌)은 합문지후를 지내다가 서북면의 반란을 평정하던 중 영주성에서 순절하여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졌고, 손자 목준평(睦俊平)은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다. 고려시대 이전의 세계가 분명하지 않아 목효기를 1세로 삼는다.

본관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의 옛 지명이다. 목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백제의 귀족 대성팔족(大姓八族) 가운데 하나인 목(木)씨가 백제 멸망 후 목(睦)씨로 변성되었다는 백제목씨변천설이며, 다른 하나는 형제의 우애가 깊어 임금이 화목을 뜻하는 목(睦)을 성으로 내렸다는 형제상목설이다. 나머지 하나는 641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파견된 당나라 8학사 중 목충(睦沖)이 연개소문의 난 때 신라로 피신해 사천 지역에 세거하였다는 설이다. 어느 설에 따르더라도 고려 이전의 계보는 분명하지 않아, 고려에서 벼슬한 목효기를 시조로 삼고 사천을 본관으로 한다.

가문의 역사

6세손 목인길(睦仁吉)이 공민왕 때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홍건적의 난과 목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라 1377년 문하찬성사에 이르면서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조선조에는 문과 급제자 34명을 포함해 과거 급제자 13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현재 인구 천 명당 급제자 수가 가장 많은 성씨로 꼽힌다. 목첨(睦詹)·목서흠(睦敍欽)·목내선(睦來善) 3대가 잇달아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는데, 조선 500년 동안 3대가 연이어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가문은 사천 목씨가 유일하다. 남인의 중진 가문이었던 까닭에 1694년 갑술환국을 고비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집성촌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경기도 동두천시와 용인시 처인구, 경상남도 사천시, 전라남도 고흥군 등에 있으며, 2015년 인구는 8,713명이다.

독립유공자 3명 확인

목자상睦子商

건국훈장 애국장

경기 양주 사람으로 1906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의병이 되어 양주·연천·포천 등지에서 활동하며 소유 농지를 처분해 의병 활동비로 내놓았다. 1908년 군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혀 1909년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986년 건국포장).

출처 확인 ↗

목치숙睦致淑

건국훈장 애족장

전남 고흥 출신으로 1919년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해 고흥 장날 거사를 준비하였다. 태극기와 선언서를 제작하고 조선독립고흥단 명의의 선언서를 작성해 배포하려다 붙잡혀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고흥기독교청년회를 창립해 야학과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

목연욱睦然旭

건국훈장 애족장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963년 대통령표창).

출처 확인 ↗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2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이름생몰년본적운동계열훈격본관 근거공적조서
목자상睦子商1870–1910경기도 양주의병건국훈장 애국장(1990)역대인명정보공훈록 ↗
목치숙睦致淑1885–1928전라남도 고흥3.1운동건국훈장 애족장(1992)위키백과 ↗공훈록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고려

목인길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숙위할 때 중랑장으로 호위한 공으로 병부상서가 되었고, 1359년 친원파 기철 일파를 제거하였다. 1374년 전라도상원수로 목호의 난을 평정하였고 1377년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조선

목첨

1546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교리 등을 거쳐 청홍도관찰사를 지냈으나 권신 윤원형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파직되었다. 선조 즉위 후 대사간·이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고 1591년 기로소에 들었으며, 임진왜란 때 강화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조선

목내선

허목의 문인으로 165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예조·호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남인의 중진으로 1689년 우의정에 올랐고 기사환국 때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유배되었다. 해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조선

목행선

1633년 식년문과 전시에서 장원하였고 성균관전적·지평·수찬·대사간·대사성·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경기도사로서 곤궁에 빠진 백성을 진휼하는 데 힘썼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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