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
開城 王氏
1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2.2만
2015 인구
239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왕국조王國祖
뒤에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된 인물로 전한다. 개성 왕씨는 그를 시조로 삼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왕실 후예로 이어져 온 성씨다. 왕건의 집안은 본래 송악(松岳)의 호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성 왕씨는 고려 왕실의 후예로, 본관 개성은 고려의 도읍이자 태조 왕건 집안의 근거지였던 송악이다. 시조 왕국조는 뒤에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엮은 『편년통록』은 왕건의 조부 작제건을 당나라 숙종의 아들로 적었으나, 고려 말의 이제현과 조선 세종 때의 정인지 등이 신빙성이 없다 하여 이를 부정하였다. 한편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가 고구려 계통 세력과 이어진다 하여 왕건 집안을 고구려의 먼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전한다. 현존하는 개성 왕씨의 90% 이상은 태조의 아들 효은태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양군파·평양공파·양양공파·안경공파·시중공파 등의 분파로 나뉜다.
가문의 역사
고려가 망한 뒤 조선 태조는 왕씨 일족을 강화와 거제 등지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처음에는 일부를 제외하고 보호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곧 정치적 반대에 부딪쳐 대규모 숙청으로 돌아섰고,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때문에 태종 때부터 많은 후손이 목숨을 부지하려 성을 바꾸었는데, 1918년에 간행된 무오보에는 옥씨 성을 쓰던 한 갈래가 본래 성으로 돌아온 사례가 유일하게 실려 있다. 태종 13년부터는 왕씨 후손의 신분을 안정시키는 쪽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족보는 1798년부터 2025년까지 아홉 차례 간행되었으며 가장 최근 것은 2025년의 을사보다. 집성촌은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과 이천시 율면 오성리, 충청북도 청주시, 충청남도 공주시 등에 있다. 2015년 인구는 22,452명이다.
독립유공자 1명 확인
서훈자 명단 본관 확인 1명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 중 본관이 공개 자료(한국역대인명정보, 위키백과)에서 확인되고 생몰년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본관 기록이 없는 서훈자가 훨씬 많으므로 실제 이 가문의 독립유공자는 이보다 많을 수 있습니다.
| 이름 | 생몰년 | 본적 | 운동계열 | 훈격 | 본관 근거 | 공적조서 |
|---|---|---|---|---|---|---|
| 왕재일王在一 | 1904–1961 | 전라남도 구례 | 학생운동 | 건국훈장 애국장(1991) | 역대인명정보 | 공훈록 ↗ |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왕건
고려를 세운 태조로, 개성 왕씨는 그의 왕실 후예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송악의 호족이었다고 전한다.
왕식렴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으로, 군부서사로 관직을 시작해 서경의 진장과 좌승·대승을 거쳐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졌다. 정종을 지지하여 서경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가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고, 그 공으로 광국익찬공신에 책록되었다. 9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왕방연
세조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인물로,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호송을 맡았다. 영월에서 돌아오는 길에 단종을 그리며 지은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 등에 전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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