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빈 이씨
河濱 李氏
2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1.8만
2015 인구
272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이거李琚
고려 명종 때 예부상서를 지낸 문신이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졌고, 이에 따라 후손들이 하빈을 본관으로 삼아 계보를 이어왔다.
시조 이거가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하빈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하빈을 관향으로 삼았다. 하빈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일대의 지명이다. 하빈면 무등2리 낫골 마을과 현내1리 새터 마을에 하빈 이씨 집성촌이 있는데, 두 마을 모두 하빈 이씨가 마을을 열었다는 구전만 전할 뿐 구체적인 입향 경위와 입향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마을 안에 시조의 묘가 있어 이를 근거로 삼고 있으며, 시조를 기리는 재실 원모재(遠慕齋)가 남아 있다.
가문의 역사
1990년대 후반까지도 낫골과 새터 두 마을에 약 54가구의 하빈 이씨가 살았으나 도시로 옮겨가는 집이 늘면서 그 규모가 줄었다. 근현대에 들어 이 가문에서는 항일운동가가 여럿 나왔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이동휘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을 지내다 신민회와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며, 대구 출신의 이종암은 1919년 길림에서 김원봉·황상규 등과 의열단을 창립하고 군자금과 폭탄을 조달하다 옥사하였다. 2015년 인구는 17,965명이다.
독립유공자 2명 확인
이동휘李東輝
건국훈장 대통령장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한성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참령에 오른 뒤,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3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오래 잊혔다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이종암李鍾巖
건국훈장 독립장1896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은행 출납계 주임으로 일하다 1917년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11월 길림에서 김원봉·이성우·황상규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폭탄 제조법을 익혀 무기 반입과 군자금 조달을 맡았으며, 1922년 다나카 기이치 저격 거사에도 참여하였다. 1925년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으다 달성에서 체포되어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1930년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확인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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