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곽씨
淸州 郭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2.1만
2015 인구
251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곽상郭祥
신라 헌강왕 때 시중(侍中)을 지낸 인물이다. 문장이 뛰어나 문창후 최치원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시조 이후 두 대의 계보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증손인 곽원(郭元)을 1세조로 삼아 세계를 잇는다.
청주 곽씨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한다. 그가 문장으로 이름나 최치원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전하나, 시조 아래 두 대의 계보가 전하지 않아 증손 곽원을 1세조로 삼는다. 곽원은 996년(성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상서를 거쳐 참지정사에 올랐고 추성문리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가문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13세 곽연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부사와 전법판사에 이르고 1350년(충정왕 2)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청주로 낙향해 세거하면서 본관을 청주로 삼았다고 한다. 본관 청주는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이다.
가문의 역사
고려 중기의 곽상(郭尙)은 추밀원좌승선과 호부상서·서경유수·형부상서를 지내고 1103년 수사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시호는 순현이다. 그 아들 곽여는 예종이 세자였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 왕의 스승으로 대우받았고, 시문뿐 아니라 경서와 도교·불교·의약에까지 두루 통하였다. 고려 후기의 곽예는 1255년 문과에 급제해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에 올랐고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으며, 원종 때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왜구를 그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고려 말의 곽충보는 왜구를 물리친 무장으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고 조선 개국 뒤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과거 급제자는 고려 문과 8명과 사마 1명, 조선 문과 14명과 무과 5명을 냈다. 세거지는 옛 청원군 강외면과 옥산면 회암리·금계리, 부용면 부강리 일대에 지파별로 분포한다. 2015년 인구는 20,713명이다.
독립유공자 0명 확인
이 가문에서 아직 확인된 독립유공자 정보가 없어요. 수록 기준은 국가보훈부 서훈자 중 본관이 공개 자료로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서훈자 명단에 있어도 본관 기록이 공개 자료에 없으면 목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아래 기록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정부, 1,006명)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등 공개 자료 기준입니다. 같은 본관이라는 사실은 직계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조상의 행적은 후손 개인의 책임과 무관합니다(헌법 제13조 제3항 연좌제 금지).
공개 자료에서 본관이 확인된 친일 행적 기록이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곽원
1029년에 죽은 문신으로, 996년(성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형부상서와 참지정사를 지내고 추성문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청주 곽씨의 1세조로 받들어진다.
곽여
1058년에 태어나 1130년에 죽은 문신으로 자는 몽득(夢得), 호는 동산처사(東山處士)이다. 1083년 과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와 홍주사·예부원외랑을 지냈고, 1113년 예종의 부름으로 개경에 올라와 궁중에서 스승의 대우를 받았다. 시호는 진정(眞靜)이다.
곽예
1232년에 태어나 1286년에 죽은 문신으로 125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를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로 이름났고, 원종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가 왜구를 금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곽충보
1403년에 죽은 무신으로 1383년 병마사로서 왜구를 물리쳤고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다. 조선이 세워진 1392년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참고 자료
같은 곽씨의 다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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