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여씨
宜寧 余氏
0명
확인 독립유공자
0명
수록 친일 기록
1.8만
2015 인구
269위
본관 인구 순위
시조와 유래
始祖 · 시조
여선재余善才
백제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의 후손으로, 송나라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다 1103년 고려에 환국하였다고 전한다. 환국한 뒤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하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든다.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는 실전되었다.
여씨는 그 기원을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扶餘氏)에 두며, 『수서』와 『송서』, 『일본서기』 등에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으로 적은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문중에서는 백제가 망한 뒤 왕족이 당나라로 옮겨 살았고 그 후손인 여선재가 고려 숙종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 이후 세계가 끊겨,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의령은 경상남도 의령군으로, 시조가 봉해졌다는 의춘군의 의춘이 이 지역의 옛 이름이다. 통계에서는 의녕 여씨로 표기된 인구도 함께 집계된다.
가문의 역사
3세 여직유가 검교장군을 지냈고, 9세 여중부는 고려 말 호부전서를 거쳐 조선에서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0세 여흥렬은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고, 11세 여원경은 안주진병마절도사를, 12세 여건은 이조정랑과 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예부전서 여중암의 아들 여덕윤은 세종 때 선산부사를 지냈는데, 그의 아들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오룡(五龍)이라 불렸고 이것이 문경 영순면 오룡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중 여효온은 1434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해 사간원 정언과 병조좌랑을 거쳐 의금부 지사가 되었고, 여춘은 임진왜란 때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집성촌은 경상남도 하동군 일대로, 연산군 때 여승탁이 의령에서 하동 양보면으로 옮겨 온 뒤 1750년 무렵 그 후손이 하동읍 화심리에 터를 잡아 대표적인 세거지가 되었으며 마을에는 재실 양심재(養心齋)가 남아 있다. 2015년 인구는 18,35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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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적 기록 0명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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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주요 인물
여효온
여덕윤의 아들로 1434년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다. 사간원 정언과 병조좌랑을 거쳐 의금부 지사를 지냈으며, 다섯 형제가 모두 문과에 올라 오룡이라 불렸다.
여건
1457년에 태어나 1517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으로, 병마절도사 여원경의 아들이다. 이조정랑과 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여흥렬
호부전서 여중부의 아들로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여춘
1554년에 태어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문경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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